작성자 : 박상융 변호사
필자의 닉네임은 콜롬보이다. 과거 피터포크 주연의 수사물 형사콜롬보를 보고 닉네임을 붙였다. 사건이 나면 콜롬보 형사는 트렌치코트(버버리코트)를 입고 용의자를 자신이 선정하면 “one more question?”식으로 집요하게 질문한다.
수사, 재판, 변론은 어찌 보면 질문의 연속(과정)이고 질문과 답변을 통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친다. 그만큼 질문은 중요하다. 질문은 짧고 임팩트 있고 답변자가 알기 쉽게 하여야 한다.
선입견을 가지고 수사관, 검사, 변호사, 판사가 원하는 질문을 하면 안 된다. 그런 질문은 진실 발견은 커녕 오히려 사건을 왜곡한다. 처벌받지 말아야 할 사람이 처벌받고 처벌받을 사람이 처벌받지 않게 된다.
질문을 하려면 사건을 잘 파악하여야 한다. 현장도 가보고 관련자의 구두진술도 들어야 한다. 그러면서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여야 한다.
궁금증을 가지고 질문을 하여야 한다. 장황한 질문, 의견성 질문, 이해하기 어려운 법률용어만 나열하는 질문은 피하여야 한다. 질문을 모르니 답변하는 사람은 어떤 답변을 할 지 모른다. 동문서답이 나온다.
수사관, 판사, 때로는 변호사가 묻는 말에만 답변하라고 중간에 답변을 가로막기도 한다.
답변 내용을 자신의 구미(의도)에 맞게 조서에 작성하기도 한다.
필자가 공판 과정에서 경찰, 검사가 제출한 유죄 증거목록을 보면 수사보고서가 많다. 수사보고서는 수사관 개인의 의견을 개진한 것에 불과하여 증거동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자의적으로 작성한 보고서도 많다. 조서는 어떨까. 문답식 조서지만 실제 조서작성 과정에서 진술을 녹화한 영상을 보면 조서 내용과 맞지 않는 경우도 있다. 조서에 기재되지 않았지만 질문과 답변한 내용도 있다. 영상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재판 과정에서 영상을 검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귀찮기 때문이다.
오히려 조서작성 후 조서에 서명날인, 조서 장수마다 간인을 했기 때문에 증거로서 신빙성이 있다고 한다. 조서를 작성하고 바로 검토를 하면 힘이 든다. 자신이 무슨 말을 했고 답변을 제대로 했는지 모르는 경우도 많다.
공판 과정에서 증인 신문, 피고인 신문은 어떨까. 증인, 피고인이 할 말을 미리 질문으로 만들어서 피고인, 증인이 예, 아니오 식으로 답변을 하게 한다. 그러한 진술만을 가지고 진실을 알 수 없다.
과거의 일을 어떻게 시간까지 제대로 알 수 있겠는가. 사람의 기억은 한정되어 있고 개인마다 다르다. 그런데 수사 과정, 재판 과정에서의 심문은 왜 그런 것을 모르냐고 다그친다.
개방적 질문이 좋은데 개방적 질문은 증언, 진술 대상자가 장황하게 답변하니 조서 기재에 힘들다. 그래서 대부분 개방적 질문보다는 예, 아니오 식의 폐쇄적 질문을 한다.
질문하기 전에 답변을 제대로 들어야 한다. 경청을 하여야 한다. 질문(수사, 판사)하는 사람부터 경청, 배려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중간에 답변을 가로막으면 답변을 할 수 없다.
피고인, 피의자가 하고자 하는 말이 있는데 질문을 하지 않으니 말을 할 수 없다. 변호사가 조력을 하려 해도 어떤 경우에는 수사, 재판 방해라고 한다.
어찌 수사와 재판뿐일까. 징계 관련 심문, 질문은 더하다. 혐의를 만든다. 조서 작성, 조사 자체가 의미가 없다. 답변(변소)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억울하면 변호사 선임, 법원에서 다투라는 책임면피식 말까지 한다.
일부 변호사도 그렇다. 속칭 plea of bargaining(유죄 인부 협상)을 한다. 부인해보았자 소용 없으니 인정하라고 한다.
조사 자체의 무의미함을 느끼기도 한다.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피감기관의 기관장, 국장을 대하는 국회의원의 자세는 더더욱 고압적이다. 자신이 질문하고 자신이 답변을 한다.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부인하는 답변을 하면 오히려 야단을 친다.
국정감사장뿐일까. 국가기관 회의, 세미나, 워크샵에서 질문, 답변 토론은 찾아볼 수 없다. 주재자가 말을 하고 참석자는 메모만 한다. 주재자는 사전에 작성한 말씀자료, 발표자료만 이야기한다. 참석자와 하는 찬반 토론은 참여하지 않는다.
국무희의, 차관회의에서 법, 예산, 제도, 정책 관련 토론은 그 자체가 없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국어 등 교육시간에 토론식 교육이 없다. 일방적으로 주입식 교육이다.
질문, 토론 이전에 경청하는 훈련과 인내가 필요하다. 그래야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묻고 답변하는 훈련, 아니 그 이전에 경청하는 훈련과 교육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