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법원 2025. 7. 24. 선고 2023다240299 전원합의체 판결

작성자 : 김지현 변호사

1. 기초적인 사실관계

원고와 피고는 상인인데, 원고는 2006. 12. 28.부터 2015. 11. 2.까지 4차례에 걸쳐 피고로부터 총 2억 4,000만 원을 차용하였고, 제1,4차 차용 당시에 피고는 원고 소유의 인천 옹진군 F토지 및 지상 건물, G 토지(이하 '이 사건 부동산'이라고만 함)에 채무자를 원고, 근저당권자를 피고로 하는 근저당권설정등기를 각 경료하였습니다. 그중 원고는 2016.경에 제1, 2 차용금 이자채무의 소멸시효가 완성된 상태에서 피고에게 1,800만 원을 일부 변제하였습니다.

그 이후에 이 사건 부동산에 관하여 실시된 경매에서 근저당권자인 피고가 461,436,162원을 배당받는 내용으로 배당표가 작성되었는데, 원고는, 피고에 대한 배당액이 피고의 실제 대여원리금 채권액을 초과한다고 주장하면서 배당표 경정을 청구하는 이 사건 배당이의의 소를 제기하였습니다. 
 
2. 원심 법원의 판단 : 원고 일부 승 (* 원고의 소멸시효 완성 주장을 배척하고 일부 변제만 인정) 

원고는 제1, 2 차용금 이자채권의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원심은, 원고가 제1, 2 차용금 이자채무의 소멸시효가 완성된 상태에서 차용금을 일부 변제함으로써 제1, 2 차용금 이자채무에 관한 소멸시효 완성의 이익을 포기하였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다만 원심 법원은 원고의 일부 변제와 관련하여 변제충당 법리에 따라 배당액 중 일부가 감액되어야 한다고 보아 원고의 배당이의 청구를 일부 인용하였습니다. 이에 원고는 원심판결 중 원고 패소 부분에 대하여 상고를 하였습니다.

3. 상고심의 주요 쟁점 : 「채무자가 시효완성 후 채무를 승인한 경우에는 시효완성 사실을 알고 그 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본 종래 대법원 66다2173 판결 등(이하 ‘추정 법리’)의 변경 여부

[대법원 1967. 2. 7. 선고 66다2173 판결]

채권이 법정기간의 경과로 인하여 소멸시효로 소멸된다는 것은 보통 일반적으로 아는 것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이므로 채무자가 시효완성 후에 채무의 승인을 한때에는 일응 시효완성의 사실을 알고 그 이익을 포기한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으므로, 이와 같은 취지로 판단한 원판결은 정당하고 논지는 이유 없다.

4. 대법원의 판단 

가. 다수의견 (8인)

(다수의견에 대하여는 대법관 권영준의 보충의견이 있음.)

(1) 쟁점에 관한 판단

대법원 다수의견은, 종전 판례의 추정 법리는 타당하지 않으므로 변경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구체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가) 추정 법리는 경험칙으로 뒷받침되지 않거나 오히려 경험칙에 어긋남 

추정 법리는 경험칙에 근거하여 시효완성 후 채무자가 채무를 승인하였다는 사실로부터 ① 시효완성에 관한 채무자의 인식, ② 시효이익 포기에 관한 채무자의 의사표시를 사실상 추정하는 법리이다.

그러나 시효완성에 관한 인식의 추정은 경험칙에 근거한다고 보기 어렵고, 단지 소멸시효 기간이 지났다는 사정만으로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알았다고 일반적으로 말하기 어렵고,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알았는지 여부는 제반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해야 할 문제다. 

시효이익 포기에 관한 의사표시의 추정도 경험칙에 근거한다고 보기 어렵고, 채무자가 시효완성으로 채무에서 해방되는 이익을 알면서도 그 이익을 포기하고 채무를 부담하겠다는 의사표시를 하는 것은 이례적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경험칙에 비추어 보면, 시효완성 후 채무승인은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하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 비교법적으로도 우리나라의 추정 법리는 이례적인 법리로 평가된다.

(나) 채무승인과 시효이익 포기는 엄격히 구별되어야 함 

시효이익 포기는 단순히 채무에 관한 인식을 표시하는 것을 넘어, 소멸시효의 완성으로 인한 법적 이익을 받지 않겠다는 효과의사의 표시가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채무승인과 구별된다. 

그런데 추정 법리는 채무승인과 시효이익 포기의 근본적 차이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채무승인행위가 있으면 곧바로 시효이익을 포기하는 의사표시를 추정하는 구조를 취하므로 타당하지 않다.

(다) 권리 또는 이익을 포기하는 의사표시는 신중하게 해석해야 함 

추정 법리는 시효완성 후 채무승인이라는 행위만을 근거로 채무자에게 중대한 불이익을 가져오는 시효이익 포기의 의사표시를 손쉽게 추정하는데, 이는 권리 또는 이익을 포기하는 의사표시에 대해 엄격하고 신중한 해석을 요구하는 대법원 판례의 일반적인 원칙과 부합하지 않다.

(라) 추정 법리는 채무자를 부당하게 불리한 지위에 놓이게 함

소멸시효는 권리자가 일정 기간 권리를 행사하지 않은 경우 일정한 요건 아래 권리를 소멸시킴으로써 법적 안정성을 도모하는 제도인데, 이를 통하여 채무자는 채무에서 벗어나는 법적 이익을 누리게 된다.

그런데 추정 법리는 시효완성 후 채무승인이라는 사정만 있으면 이로써 시효완성 사실에 대한 인식과 시효이익 포기의 의사표시를 추정하고, 채무자로 하여금 추정을 번복하게 할 부담을 부과하고, 이는 채무자를 본래 법이 예정하지 않았던 불리한 지위에 놓이게 하는 것이다.
 
(2) 판례의 변경 

채무자가 시효완성 후 채무를 승인한 경우 시효완성의 사실을 알고 그 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본 대법원 1967. 2. 7. 선고 66다 2173 판결 등은 이 판결의 견해에 배치되는 범위에서 이를 변경한다.

(위 판결 : 대법원 1992. 5. 22. 선고 92다4796 판결, 1999. 1. 26. 선고 98다46808 판결, 2013. 5. 23. 선고 2013다12464 판결, 2022. 5. 12. 선고 2021다244, 251 판결 등)
 
(3) 이 사건의 결론 : 원고 패소 부분 파기환송 

(가) 제1, 2 차용금 이자채무에 대한 시효이익 포기 여부 : X 

원고가 제1, 2 차용금 이자채무의 소멸시효가 완성된 상태에서 피고에게 (제4 차용금의 약정이자와 일치하는 액수인) 1,800만 원을 일부 변제한 사실은 인정되나, 그것만으로 당시 원고가 제1, 2 차용금 이자채무의 시효완성 사실을 알면서도 그로 인한 법적인 이익을 받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를 하였다고 추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원심은 원고가 일부 변제 당시 제1, 2 차용금 이자채무의 시효완성 사실을 알면서도 시효이익을 포기하는 의사표시를 하였는지 여부를 구체적으로 심리를 하지 않은 채, 일부 변제 사실로부터 곧바로 제1, 2 차용금 이자채무의 시효완성 사실을 알고도 그 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추정하여 원고의 소멸시효 완성 주장을 배척하였다. 이러한 원심 판단에는 시효이익 포기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고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아니하여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

한편 원심판결의 원고 패소 부분 중 제1, 2 차용금 이자채무에 관하여 원고가 시효이익을 포기하였다고 판단한 부분을 파기할 경우 원고와 피고가 배당받을 정당한 금액을 새로 산정할 필요가 있으므로, 원심판결 중 원고 패소 부분을 전부 파기하여야 한다.

(나) 원심판결 중 원고 패소 부분을 파기하고 인천지방법원에 환송함
 
나. 대법관 노태악, 대법관 오석준, 대법관 엄상필, 대법관 이숙연, 대법관 마용주(대법관 5인)의 별개의견

별개의견은 원심판결 중 제1, 2 차용금 이자채무에 관한 판단 부분에는 시효이익 포기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고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아니하여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는 결론에는 동의하면서도, 추정 법리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원심이 법리를 잘못 해석·적용한 것이므로 추정 법리에 관한 판례 변경은 필요하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구체적으로 다수의견이 내세우는 시효이익 포기의 의사표시에 관한 구체적 판단기준과 종전 판례의 의사해석 판단기준 사이에 본질적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즉 추정 법리는 대법원이 오랜 시간에 걸쳐 타당성을 인정하고 적용해온 것으로서 여전히 법리적으로나 실무적으로 타당하므로 유지되어야 하는바, 추정 법리의 근거인 경험칙이 처음부터 명백히 잘못되었다거나 사회일반의 상식에 반하는 것이 되었다고 볼 만한 자료는 없다고 보았습니다. 

추정 법리는 사실상 추정에 불과하므로 반증으로 추정이 번복될 수 있는바, 대법원은 추정 법리를 유지하면서도 채무승인과 시효이익 포기를 준별하고 있고, 시효이익 포기의 의사표시가 존재하는지에 관한 의사해석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타당한 결론을 도출해왔으므로 추정 법리가 채무자를 불리한 지위에 놓이게 한다거나 부당한 결과를 야기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결국 별개의견은 원심은 '채무자가 시효완성 후 채무를 승인한 경우에는 시효완성 사실을 알고 그 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법리를 적용함에 있어 그 추정의 전제가 되는 채무승인 사실의 인정 및 시효이익 포기의 효과의사 유무에 관한 의사해석에 관하여 종전 판례의 법리에 어긋나는 판단을 한 것이지 원심이 적용한 추정 법리 자체가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판단에 이른 것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이에 별개의견은 원심판결 중 원고 패소 부분을 파기하고 원심법원에 환송하여야 한다는 점에서는 다수의견과 결론을 같이하지만, 추정 법리를 폐기하는 판례 변경에는 찬성할 수 없다는 의견을 제시하였습니다.

5. 시사점

이 판결은 일반인의 상식과 경험칙에 부합한다고 보기 어려웠던 획일적인 추정 법리를 폐기하고, 원칙으로 돌아가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알고도 그 이익을 포기하는 의사표시를 하였는지 여부를 구체적으로 판단하도록 함으로써, 채무자에게 불리하게 치우쳤던 심리 구조를 공평하게 바로잡고 구체적 타당성을 도모하였다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다만, 이 판결은 기존 대법원 판결의 추정의 법리만을 폐기하는 것이고, 채권자가 채무자가 시효이익을 포기하였다는 사실에 대하여 충분히 입증을 하면, 채무자의 시효이익 포기는 여전히 인정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