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탁] 신탁계약상 자금집행순서의 법적 성질
- 대법원 2023. 6. 29. 선고 2023다221830 판결
김윤기 변호사
1. 사실관계
A회사는 2017. 3. 15. B회사와 사이에 공사대금을 54,571,000,000원으로 정한 공사도급계약(이하 ‘이 사건 공사계약’)을 체결하였습니다.
A, B회사와 C신탁사는 2018. 5. 16. 신탁사업약정을 체결하면서, 수탁자의 조달자금 자금집행순서에 관하여 7순위로 공사비의 90%, 13순위로 잔여건축공사대금을 정하였습니다.
A, B회사와 C신탁사는 같은 날 관리형 토지신탁계약(이하 ‘이 사건 신탁계약’)을 체결하면서 이 사건 공사계약에 관하여 공사비의 90%는 매 2개월 단위로 신탁계약에서 정한 바에 따라 지급하고, 잔여공사비는 1~3순위 우선수익자의 대출원리금이 모두 상환되고 수탁자(C신탁사)의 신탁사무처리비용의 정산이 완료된 이후 신탁재산의 범위 내에서 시공사(B회사)에게 지급하며, 수탁자의 고유재산으로 시공사에게 공사대금 지급의무를 지지 아니한다고 정하였습니다.
A, B회사, C신탁사는 같은 날 이 사건 공사계약에 대한 승계계약(이하 ‘이 사건 승계계약’)을 체결하면서, 위 신탁사업약정서와 이 사건 신탁계약을 승계계약서보다 우선 적용하기로 정하였습니다.
B회사는 2018. 11. 7. D회사에 이 사건 공사 중 기계설비, 소방공사를 대금 3,876,400,000원으로 정하여 하도급하였고, 해당 하도급계약은 2019. 3. 30. 소방공사를 제외한 기계설비공사만 진행하고 공사대금을 2,042,700,000원으로 감축하는 내용으로 변경되었습니다.
B회사(수급인, 시공사), D회사(하수급인), C신탁사는 2019. 7. 29. 이 사건 하도급계약에 의한 공사대금을 C신탁사가 직접 D회사에 지급하기로 하는 내용의 하도급대금 직불합의(이하 ‘이 사건 직불합의’)를 하면서, ‘본 합의를 통하여 C신탁사가 부담하게 되는 공사대금의 범위는, C신탁사와 B회사 사이의 공사도급계약에 따라 C신탁사가 B회사에게 지급해야 할 공사대금채무의 범위를 초과하지 않고, C신탁사는 D회사의 직접 지급 요청이 있기 전에 C신탁사가 B회사에 대하여 대항할 수 있는 사유 등으로써 D회사에게 대항할 수 있다’고 약정하였습니다.
이후 2020. 2. 26. 변경계약에 따라 B회사의 공사대금은 48,819,200,545원으로 변경되었고, C신탁사는 이 사건 승계계약에 따라 B회사 또는 B회사의 하수급인에게 C신탁사가 B회사에 대하여 부담하는 공사대금의 90%를 넘는 금액을 지급하였습니다.
D회사는 이 사건 직불합의를 이유로, C신탁사에 대하여 지급받지 못한 하도급대금을 청구하는 소를 제기하였습니다.
2. 대법원의 판단
대법원은 아래와 같이 판시하면서, 원심판결 중 C신탁사(피고) 패소 부분을 파기하고, 사건을 대전고등법원에 환송하였습니다(대법원 2023. 6. 29. 선고 2023다221830 판결).
발주자·원사업자 및 수급사업자 사이에서 발주자가 하도급대금을 직접 수급사업자에게 지급하기로 합의하여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이하 ‘하도급법’이라 한다) 제14조 제1항, 제2항에 따라 수급사업자의 발주자에 대한 직접 지급청구권이 발생함과 아울러 발주자의 원사업자에 대한 대금지급채무가 하도급대금의 범위 안에서 소멸하는 경우에, 발주자가 직접지급의무를 부담하게 되는 부분에 해당하는 원사업자의 발주자에 대한 공사대금 채권은 동일성을 유지한 채 수급사업자에게 이전되고, 발주자는 수급사업자의 직접 지급청구권이 발생하기 전에 원사업자에 대하여 대항할 수 있는 사유로써 수급사업자에게 대항할 수 있으나, 수급사업자의 직접 지급청구권이 발생한 후에 원사업자에 대하여 생긴 사유로는 수급사업자에게 대항할 수 없음이 원칙이다(대법원 2010. 6. 10. 선고 2009다19574 판결, 대법원 2015. 8. 27. 선고 2013다81224, 81231 판결 등 참조). 하도급법은 발주자에게 도급대금채무를 넘는 새로운 부담을 지우지 아니하는 범위 내에서 수급사업자가 시공한 부분에 상당한 하도급대금채무에 대한 직접지급의무를 부담하게 함으로써 수급사업자를 원사업자 및 그 일반채권자에 우선하여 보호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입법 취지를 고려하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발주자는 하도급법 시행령 제9조 제3항에 따라 원사업자에 대한 대금지급의무를 한도로 하여 하도급대금의 직접지급의무를 부담한다(대법원 2015. 5. 28. 선고 2014다203960 판결, 대법원 2017. 12. 13. 선고 2017다242300 판결 등).
앞서 본 사실관계를 위 법리에 비추어 보면, 하도급법상 원사업자이자 이 사건 신탁약정, 신탁계약, 승계계약 등을 체결한 당사자인 B회사가 C신탁사 등과 사이에 신탁사업약정 등에 따른 자금집행순서에 따라 공사대금을 청구하기로 합의한 이상 C신탁사는 B회사가 공사대금을 청구할 경우 자금집행순서 약정을 이유로 지급을 거절할 수 있다. 그리고 발주자인 C신탁사가 하도급법상 직접지급의무를 부담하는 공사대금 채권은 동일성을 유지한 채 수급사업자인 D회사에게 이전되고, C신탁사는 새로운 부담을 지지 않는 범위 내에서 직접지급의무를 부담하므로, C신탁사는 D회사의 직접청구에 대해서도 동일한 사유로 대항할 수 있다.
이 사건 신탁약정 등에서는 C신탁사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자금집행순서에 어긋나게 자금을 집행할 수 없도록 정하고 있다. 그리고 B회사를 비롯한 이 사건 신탁약정 등의 당사자는 사업진행의 효율성, 사업성패에 대하여 각자 부담가능한 위험의 정도 등을 고려하여 사업 성패에 따른 위험을 일부씩 부담하는 차원에서 자금집행순서에 따라 공사대금을 지급받는 것을 양해하면서 위 계약을 체결하였다고 보인다. 이러한 자금집행순서 관련 약정의 문언, 동기와 목적 등 제반사정을 고려하면, 이 사건 사업시행에 따른 건물 완공 후 일정 기간이 도과하였다고 하여 집행순서와 상관없이 신탁자금에서 지급받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신탁약정 등의 당사자들 의사에 부합한다고 볼 수 없고, 선순위 채권에 대한 자금이 집행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후순위 채권을 지급하지 않는다는 취지에서 자금집행순서를 정한 것으로 보아야 하므로, 위 자금집행순서의 성격은 정지조건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3. 판결의 의의
부관이 붙은 법률행위에 있어서 ① 부관에 표시된 사실이 발생하지 아니하면 채무를 이행하지 아니하여도 된다고 보는 것이 상당한 경우에는 조건으로 보아야 하고, ② 표시된 사실이 발생한 때에는 물론이고 반대로 발생하지 아니하는 것이 확정된 때에도 그 채무를 이행하여야 한다고 보는 것이 상당한 경우에는 표시된 사실의 발생 여부가 확정되는 것을 불확정기한으로 정한 것으로 보아야 하므로(대법원 2003. 8. 19. 선고 2003다24215 판결, 대법원 2011. 4. 28. 선고 2010다89036 판결 참조), ‘불확정기한’과 ‘정지조건’의 구별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런데, 본 대법원 판결은, 이 사건 신탁계약상 자금집행순서의 성격이 불확정기한에 해당한다고 본 원심을 파기하고, 이 사건 신탁계약상 자금집행순서의 성격이 ‘정지조건’에 해당한다고 판시하였습니다.
따라서, 신탁계약상 자금집행순서가 명시되어 있을 경우, 신탁사로서는 그 순서에 위반한 자금집행을 거절할 수 있게 됩니다. 나아가, 선순위 집행순서의 자금집행이 이루어지지 아니한 상황에서, 후순위 집행순서에 따른 채권자는 신탁사에 대하여 금전지급청구를 하더라도 해당 청구는 기각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관리형 토지신탁계약 특약사항에서 제1순위 자금집행순서로 ‘국세, 지방세 등 제세공과금’, ‘신탁사무 처리비용’, ‘신탁보수’ 등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고, ‘수분양자의 분양계약 해지, 해제시 해당 수분양자에 대한 분양수입금 반환’ 역시 제1순위 자금집행순서로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해당 비용이 수시로 발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 대법원 판결의 판시에만 의할 경우, 제1순위 자금집행순서에 기재된 각종 비용 등이 완제되지 아니할 경우 신탁사는 대출원리금, 공사비, 용역비 등 각종 자금집행을 모두 거절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신탁사가 앞서 언급한 제1순위 비용이 먼저 집행되어야 한다는 항변을 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추후 선고되는 판결에 계속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아울러, 시공사나 용역업체 등 관리형 토지신탁계약에 따라 신탁사로부터 자금집행을 받아야 할 경우에는, 신탁계약서 특약사항 등에 명시된 자금집행순서에 더욱 유의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