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 법조인들의 과이불개(過而不改)
김광중 변호사
영화 '넘버3'에서 송강호는 그 조직원들에게 ‘현정화’가 라면만 먹고 육상에서 금메달을 땄다고 말한다. 조직원 중 한 명이 사실을 바로잡아 주지만 돌아오는 것은 무자비한 폭력이다. 결국 그 조직원들은 사실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송강호의 말을 따른다. 그 조직에서 ‘임춘애’는 ‘현정화’가 된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그 세상에서는 고쳐지지 않는다. 우월한 폭력에 의해 지배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조직폭력배들을 묘사한 장면이지만 법조인들에게서도 비슷한 모습을 찾을 수 있다.
형사 재판에서 형벌은 법이 정한 ‘법정형’에서, 법률상 가중과 감경을 한 ‘처단형’ 범위 내에서 선고된다. 자수(自首)나 미수(未遂)는 법률상 감경 사유 중 한 예다. 형법 제55조는 형의 법률상 감경 방법에 관해 정하면서 ‘다액(多額)’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벌금을 감경할 때에는 그 다액의 2분의 1로 한다.’는 표현이다. 여기서 ‘다액’을 법조인들은 ‘많은 액수’로 해석하지 않고 ‘많은 액수와 적은 액수’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법에서 정한 형을 감경할 때에는 그 상한과 하한을 모두 2분의 1로 한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다액(多額)’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사전적으로 ‘많은 액수’임이 명백하지만 그렇게 한다.
그 연원을 보면 일본 형법을 의용한 구형법에서 ‘금액’으로 되어 있던 것을 1953년 현행 형법을 제정하면서 ‘다액’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금액’이라는 표현은 ‘많은 액수와 적은 액수’ 모두를 의미할 수 있지만 ‘다액’은 ‘많은 액수’만을 의미할 뿐이다. 그랬더니 다른 형법 규정들과 맞지 않는 모순이 다수 발견되었다. 그러자 대법원은 1978년 ‘다액’의 의미를 앞에서와 같이 ‘많은 액수와 적은 액수’로 해석하는 판결을 함으로써 모순을 해결하였다. 문언의 사전적 의미와 맞지 않으므로 죄형법정주의에 반한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형의 감경 범위를 넓히는 국민의 이익을 위한 것이므로 그렇게 해석해도 된다고 보았다. 당시 대법원은 이 표현이 입법상 잘못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그렇게 해석했다. 유신독재 시절 국민의 권리를 지키려는 사법부의 기개였을지도 모른다.
이후 형사재판에서 법원은 지금까지 44년째 ‘다액’을 ‘많은 액수와 적은 액수’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판결을 계속하였다. 법조인의 실무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사법연수원에서는 이와 같은 해석을 마치 공식처럼 가르쳤다. 현행 형법은 1953년 제정된 이후 현재까지 70년 동안 모두 25회 개정되었다. 그러나 이 표현은 단 한 차례도 개정되지 않아서 지금도 그대로다. 해당 조항이 형법 제정 67년 만인 2010년 개정되었지만 이 표현은 고쳐지지 않았다. 그렇게 ‘다액’은 일반인들이 인식하는 의미와 달리 형사재판 과정에서는 ‘많은 액수와 적은 액수’라는 의미로 수십 년째 해석∙적용되고 있다.
문제는 이 조항을 개정하려는 시도도 아예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회에 상정되었던 형법 개정안들을 살폈으나 이 표현을 바로잡으려는 개정안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법조인이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각종 시험들에서 이 조항은 단골 시험문제였다. 법조인들이라면 알 수밖에 없는 문제점이다. 그럼에도 이 표현은 개정 시도도 없이 일반 국민의 인식과는 다른 의미로 계속 해석∙적용되고 있다. 그 단어의 본래 의미와는 다르더라도 법조인들이 이를 모순이 없게 해석∙적용하고 있으니 굳이 개정할 필요조차 없다고 인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일반 국민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법조인 자신들만 알아서 맞게 해석하면 된다는 오만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현정화’가 아니라 ‘임춘애’라는 것을 알면서도 잘못을 고치지 않고 “내가 현정화라면 현정화야”라고 강요하는 넘버3 송강호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교수신문은 ‘과이불개(過而不改)’를 지난 해의 사자성어로 선정했다. ‘잘못을 하고도 고치지 않는다’는 뜻이니 이태원 참사 등을 겪으며 드러난 세태에 그보다 더 적절한 말이 있을까 싶다. 또한 이는 일반 국민의 인식과는 거리가 먼 법조인들 태도에도 적합한 표현이다. 앞서 아주 오래된 예를 들었지만 법조인들의 오만한 태도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직업이기 때문인지 모르나 ‘항상 내가 옳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자기 잘못을 고치려 하지 않는 법조인들을 자주 보게 된다. 더 나아가서는 ‘항상 우리가 옳다’며 조직 이기주의를 보이는 행태도 수 없이 접하게 된다.
그러나 법조인들이 금과옥조로 들이미는 그 법의 잣대는 대부분 태생적으로 항상 옳은 것일 수는 없다. 법은 세상의 변화를 뒤쫓아 가므로 법의 잣대는 어느 순간 현실에 맞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다른 가치와 수단은 침묵해야 하고 법의 잣대만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시절인데 그 잣대마저 온전하지 않은 경우가 많은 것이다.
현실에 맞지 않을 수도 있는 법의 잣대를 무조건 휘두르기보다 그 현실에 대한 이해를 우선해야 한다. 법의 잣대만을 들이대야 하는 때인지, 그 잣대가 현실에 맞는 것인지 먼저 살펴야 한다. 법조인들 스스로 자신이 넘버3의 송강호가 아닌지 돌이켜보아야 한다. 정치권력을 휘두르는 법조인들이라면 더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