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투자] 상품 구분도 못하는 해외파생상품약관,
계속 방치할 것인가?
김광중 변호사
※ 아주경제 2023. 2. 23.자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약관(約款)은 계약의 한쪽 당사자가 여러 명의 상대방과 체결하기 위하여 미리 마련한 계약의 내용을 말합니다. 그 상대방인 고객은 약관을 내용으로 하는 계약을 체결할 것인지 아닌지의 선택만 가능합니다. 필연적으로 그 약관을 마련하고 이를 계약의 내용으로 삼고자 하는 사업자에게 유리하게 됩니다. 약관을 사용하는 거래에서의 고객 보호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우리 약관규제법은 불공정한 약관 사용을 방지하는 규정들을 두고 있습니다. 신의성실의 원칙을 위반하여 공정성을 잃은 약관 조항은 무효로 하고, 사업자의 책임을 과도하게 제한하는 규정은 무효로 하는 것 등이 그 예입니다.
표준약관은 통상 어떤 분야의 사업자 단체가 마련합니다. 그 취지는 건전한 거래질서를 확립하고 불공정한 내용의 약관이 통용되는 것을 방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표준약관은 동일한 내용으로 구성되므로 구체적 타당성을 기하지 못하는 문제를 낳습니다. 다른 경우에는 다른 내용의 약관이 사용되어야 하는데, 표준약관이라는 이유로 사정이 다름에도 동일한 약관이 사용되어 오히려 더 불공정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금융투자협회가 마련한 해외파생상품 계좌설정 표준약관(‘해외파생상품약관’)이 바로 오히려 불공정한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입니다. 위 약관은 해외파생상품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모두 동일한 내용으로, 하나의 약관만 사용하도록 되어 있어 오히려 고객을 위험에 빠뜨리는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해외파생상품은 어떤 거래소의 상품인지, 기초자산이 무엇인지, 기초자산 자체를 거래하는 선물인지 기초자산을 일정 가격에 사고 팔 수 있는 옵션인지에 따라 상품의 손익구조가 전혀 다릅니다. 손익구조가 다르므로 고객인 금융소비자의 위험성도 상품에 따라 전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국내 한 증권사는 모두 67개의 해외파생상품 거래를 취급하고 있습니다. 시카고상품거래소, 싱가폴증권거래소, 유럽파생상품거래소, 홍콩증권거래소, 오사카증권거래소 등 대표적인 해외거래소들의 상품을 모두 취급하고 있습니다. 거래상품도 통화, 지수, 금리, 농산물, 축산물, 에너지 등이 망라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손익구조가 모두 다른 상품임에도 해당 증권사는 모두 동일한 내용의 표준약관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상품에는 맞는 약관이더라도 다른 상품에는 맞지 않는 경우가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모두 사람이라는 이유로 그 차이를 무시하고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금융투자협회 표준약관의 무차별성 문제는 결국 대형사고를 내고 말았습니다. 지난 2020년 2월 한 증권사가 선물이나 미국형 옵션에 맞는 조치를, 전혀 다른 상품인 유럽형 옵션에 마구잡이로 적용해서 고객의 자산을 모두 강제로 처분해 버린 것입니다. 그로 인해 단 하루만에 고객에게 발생한 손해가 무려 800억 원이 넘습니다.
유럽형 옵션은 옵션 매수자가 만기에만 권리를 행사할 수 있습니다. 반면 미국형 옵션은 만기 전에도 권리를 행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옵션 투자 손익구조를 근본적으로 달라지게 합니다. 아예 다른 상품인 것입니다. 옵션 가격의 변화나 기초자산 가격의 변화는 두 가지 옵션에서 전혀 다른 손익변화를 가져옵니다. 예를 들어, 만기가 남아 있는 상황에서 옵션 가격 급변이 미국형 옵션에서는 위험한 것이어도, 유럽형 옵션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모두 해외파생상품에 해당한다고 하여 동일하게 취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거래소의 코스피200 주가지수 옵션이나, 오사카거래소의 니케이225 주가지수 옵션은 유럽형 옵션에 해당합니다. 두 거래소는 모두 기초자산이나 옵션의 가격 변화를 증거금 산정에만 반영할 뿐 고객의 자산을 강제로 청산할 수 있는 사유로 삼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니케이225 주가지수 옵션을 일본 증권회사를 통해 거래하면, 아무리 옵션 가격이 변하더라도 강제청산의 사유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금융투자협회 표준약관을 이용하는 한국의 증권회사를 통해 거래하면 강제청산의 사유가 되어 버립니다. 같은 상품을 동일하게 거래하더라도 일본에서 하면 강제청산을 당하지 않는데, 한국에서 하면 강제청산을 당하게 되는 황당한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유럽형 옵션이 한국에서는 전혀 다른 유형인 미국형 옵션처럼 취급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황당한 사고에 대해 해당 증권사는 그 강제청산이 금융투자협회의 표준약관에 따른 것이므로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해외파생상품의 종류가 매우 많고 그 손익구조가 모두 다름에도 이를 단 하나의 약관으로, 모두 동일하게 취급하고 있는 금융투자협회 표준약관이 대형사고의 원인이 된 것입니다. 결국 국내 증권회사를 이용해 해외파생상품 거래를 하는 것은 투자가 아니라 도박이 되고 맙니다. 모두 다른 유형의 수 십 가지 해외파생상품이 있는데, 모두 동일한 약관을 사용하므로 어떤 경우에, 어떻게 적용될지 종잡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래서는 국내 증권회사를 통한 해외파생상품 거래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최근 “모든 부처가 산업부라는 생각으로 뛰어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산업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라는 취지입니다. 이를 금융위원회에 적용하면 우리 금융산업 발전을 가로막는 문제들을 바로잡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수 많은 해외파생상품들을 모두 동일하게 취급하는 황당한 표준약관을 그대로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금융위원회의 조치가 시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