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법원 2025. 1. 23. 선고 2024다243172 판결

작성자 : 김현우 변호사

1. 사실관계

가. 원고와 독일 A회사의 계약 체결

원고는 2012. 9. 19. 독일 A 회사(GmbH, 2021. 12. 20. 피고 회사에 흡수합병 되었음)와 공급자는 A회사, 수요자는 '원고', 공급물품은 '강관 스레딩 설비(Steel Pipe Threading Machine) 2기', 물품대금은 '2,800,000 유로'로 정하여 공급계약을 체결하였습니다(이하 '이 사건 공급계약'이라고 하고, 그 계약서를 '이 사건 공급계약서'라고 합니다).

이 사건 공급계약서에는 영문 부분과 국문 부분이 병기되어 있는데, 아래와 같은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8. 통제 법률(Arbitration)

본 합의는 한국 법률이나 국제사법재판중재위원회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All disputes, controversies, Claims or Difference arising out of, or in relation to this agreement, or a breath(breach의 오기로 보임) hereof, shall be finally settled by Korean Law or in accordance with the Commercial Arbitration committee of International Commercial Law. 

본 합의서는 양측의 서명 또는 날인하여 국문(영문) 총 2부를 유효본으로 하며, 수요자, 공급자 각각 1부씩 부관한다.
This agreement is signed or sealed by both sides with a total of two copies of valid in Korean(English). And Buyer and Supplier, each retaining one copy.


나. 원고의 피고 (A회사를 흡수합병)

원고는 A회사의 채무불이행으로 이 사건 공급계약이 해제되었음을 전제로 피고를 상대로 원상회복의무의 이행으로 원고가 지급한 물품대금 2,528,080 유로와 이에 대한 지연손해금의 지급을 구하는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피고는 원고와 A회사가 위와 같이 '8. 통제 법률(Arbitration)' 조항을 이 사건 공급계약서에 포함시킴으로써 이 사건 공급계약과 관련하여 발생하는 모든 분쟁을 중재에 의하여 해결하기로 하는 전속적 중재합의를 하였으므로, 소송이 부적법하여 각하 판결이 선고되어야 한다는 본안 전 항변을 하였습니다. 

2. 원심 판결 (서울고등법원 2024. 4. 24. 선고 2023나2046426 판결)

원심 판결에서는 국문본과 영문본을 대등한 지위에 놓고 양자가 서로 최대한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고 전제한 후, 원고와 A회사는 '8. 통제 법률(Arbitration)' 조항 중 "한국법률의 통제(by Korean law)" 부분을 통하여 준거법에 관하여만 합의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법에 따른 분쟁해결 수단을 수용하는데 합의하였다고 해석하면서, 위 조항은 준거법에 관한 조항이면서 선택적 중재조항에 해당하고, 선택적 중재조항은 계약의 일방 당사자가 상대방에게 중재절차를 선택하여 그 절차에 따라 분쟁해결을 요구하고 이에 대하여 상대방이 별다른 이의 없이 중재절차에 임하였을 때 비로소 중재합의로서 효력이 있는데(대법원 2004. 11. 11. 선고 2004다42166 판결 등 참조), 원고가 중재합의의 존재 사실을 적극적으로 부인하면서 소송을 유지하고 있으므로 결국 '8. 통제 법률(Arbitration)' 조항이 중재합의로서의 효력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하여 본안 전 항변을 배척하였습니다.
  
3. 대법원의 판단

그러나 대법원은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중재합의로서의 효력이 있다고 보아 각하 판결을 하였습니다. 

「중재법이 적용되는 중재합의는 계약상의 분쟁인지 여부에 관계없이 일정한 법률관계에 관하여 당사자 간에 이미 발생하였거나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분쟁의 전부 또는 일부를 중재에 의하여 해결하도록 하는 당사자 간의 합의를 말한다(중재법 제3조 제2호). 중재합의의 대상인 분쟁에 관하여 소가 제기된 경우에 피고가 중재합의가 있다는 항변을 하였을 때에는, 그 중재합의가 무효이거나 효력을 상실하였거나 그 이행이 불가능한 경우가 아닌 한 법원은 그 소를 각하하여야 한다(제9조). 여기에서 중재법상 위 항변의 근거가 되는 중재합의는 대상 분쟁을 법원의 판결에 의하지 아니하고 중재에 의하여 해결하겠다는 이른바 ‘전속적 중재합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전속적 중재합의가 성립하였는지는 당해 중재조항의 내용, 당사자가 중재조항을 두게 된 경위 등 구체적 사정을 종합하여 당사자들의 진정한 의사를 합리적으로 해석하여 판단하여야 한다(대법원 2004. 11. 11. 선고 2004다42166 판결 등 참조). 이때 당사자들이 계약서에 중재에 관한 조항을 별도로 둔 사정은 분쟁을 중재에 의하여 해결하겠다는 당사자들의 의사를 추단하는 유력한 자료가 될 수 있다.

한편 중재조항의 해석을 통해 장래 분쟁을 중재에 의하여 해결하겠다는 합의가 인정되는한 비록 그 중재조항에 중재기관, 준거법이나 중재지가 명시되어 있지 않더라도 중재합의로서의 효력이 인정될 수 있고(대법원 2007. 5. 31. 선고 2005다74344 판결 참조), 중재조항의 일부 문언이 모호하고 상충되거나, 존재하지 않는 중재기관이나 중재인을 지정하는 등 중재조항에 다소간의 흠결이 있다고 하여 그러한 사정만으로 유효한 중재합의가 아니라고 쉽게 단정하여서는 안 된다.

이 사건 공급계약서에는 국문과 영문이 병기되어 있는데 국문 부분과 영문 부분이 상호 대응하도록 의도된 것으로 보이는데도 그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 그런데 이 사건 공급계약에는 특정 언어로 기재된 부분을 우선한다는 등의 약정은 없고, 당사자들 사이에 거래를 위한 교섭단계부터 이 사건 공급계약서 작성까지 주로 사용된 언어가 무엇인지, 어느 언어로 먼저 계약서가 작성되었는지 등도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러한 사정에 비추어 보면, 특정 언어 기재 부분을 우선할 것이 아니라 양 언어로 기재된 부분을 대등한 지위에 놓고 당사자의 의사를 살펴야 한다는 원심 판결의 취지는 받아들일 수 있다.

이 사건 조항의 표제는 국문으로는 “통제 법률”이지만 영문으로는 “Arbitration(중재)”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 사건 조항 본문의 국문 부분은 “국제사법재판중재위원회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고 하여 중재기관의 통제를 언급하고 있으며, 영문으로는 보다 명확하게 “All disputes,... shall be finally settled by ...in accordance with the Commercial Arbitration committee of International Commercial Law(모든 분쟁 등은... 국제상사법의 상사중재위원회에 의하여 해결되어야 한다)”고 기재되어 있어, 중재절차로 분쟁을 해결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한편, 이와 병렬적으로 규정된 “한국법률의 통제(by Korean Law)” 부분은 그 문언의 내용과 체계에 비추어 준거법에 관한 합의로 읽혀지고, 재판절차를 포함하여 대한민국법에 따른 분쟁해결수단을 수용하는 합의까지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또한 중재절차에 관한 조항을 두면서 재판절차를 분쟁해결의 수단에서 배제한다는 문구를 포함시키지 않았다고 하여 그러한 사정만으로 재판절차 역시 분쟁해결수단으로 합의하였다고 당사자의 의사를 해석할 것은 아니다.

앞서 본 법리와 이러한 사정을 종합하면, 이 사건 조항을 통해 나타난 당사자들의 의사는 중재로 분쟁을 해결하겠다는 취지로 판단되고 분쟁해결수단으로 대한민국에서의 재판 또는 중재를 선택적으로 정하였다고 보이지 아니한다. 따라서 원고와 소외 2 회사 사이에는 이 사건 공급계약과 관련한 분쟁을 중재를 통하여 해결하고자 하는 전속적 중재합의가 성립하였다고 봄이 타당하다. 

비록 이 사건 조항에 지정된 중재기관이 존재하지 않는 기관이기는 하나 장래 분쟁을 중재에 의하여 해결하겠다는 당사자들의 의사가 인정되는 이상 그러한 이유만으로 중재합의의 효력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 사건 공급계약 해제를 원인으로 한 원상회복으로 물품대금의 지급을 구하는 원고의 이 사건 소는 중재합의의 대상인 이 사건 공급계약상 분쟁에 관하여 제기된 것이고, 피고가 중재합의가 있다는 항변을 하였으므로, 중재법 제9조 제1항에 따라 법원은 이 사건 소를 각하하여야 한다.」

4. 판결의 의의

본 판결은 비록 존재하지 아니하는 중재기구를 기재하였다고 하더라도, 'arbitration'이라고 명시되어 있고 'all disputes', 'shall be finally settled by'라고 기재되어 있으므로 중재로 분쟁을 해결하겠다는 의사가 드러나 있으므로 유효한 전속적 중재합의가 있는 것으로 봄으로써 그 해석을 완화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 사건 공급계약서상으로 명시적으로 국문이 우선한다고 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영문의 기재를 중점적으로 보아 당사자의 의사를 해석한 것입니다.